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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자료 |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제7장 복음서 - 하나의 이야기, 다양한 면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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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규태 작성일2006-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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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복음서 - 하나의 이야기, 다양한 면모들.

복음서도 보기에는 해석하기가 대단히 쉬워 보인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 등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누구라도 논리상 한편으로는 서신서를 해석할 때 사용한 원리를,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설화를 해석할 때 사용한 원리들을 따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복음서는 독특한 문학 장르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런 복음서의 문학 장르에 유비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해석학적 난제들도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해석학적 난제는 '하나님의 나라' 이해와 관련된 것이다.

복음서의 특징.
복음서 해석에 있어서 직면하는 모든 난제들은 다음의 2가지로 말할 수 있다.
1) 예수님께서 친히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사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기록한 책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책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교훈을 대단히 많이 수록하고 있다.
2) 복음서는 4개가 있다는 사실. 이런 이유는 무엇인가? 사도행전에 대해서는 4권을 갖고 있지 않다. 또 처음 세 복음서의 자료들이 거의 유사하여, 우리들은 이들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른다.
네 권의 복음서가 존재하는 이유는 곧 예수님에 대한 책을 필요로 하는 각기 다른 기독교 공동체들이 존재하였다는 데에 있다. 하나의 어떤 공동체나 신자들의 모임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가 또 다른 공동체의 모든 필요를 충족시켜 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의 복음 - 가장 일반적인 견해로서 기록된 마가복음 - 이 먼저 기록되었고, 그 복음이 상당히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려는 여러 이유들 때문에 '재기(再記)'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다.
이들 복음서와 별개로 요한은, 여전히 또 다른 일련의 이유들 때문에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종합적인 역사로써 이루어졌다.

각 복음서는 동일한 가치와 동일한 권위를 지닌 것으로서 서로 병존하였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왜냐하면, 매 경우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두 차원이었기 때문이다.
첫째, 순전히 역사적인 관심으로서, 예수님이 누구시며, 그가 무엇을 말씀하셨고, 행하셨는가에 치중한 차원이다.
둘째, 실존적 관심으로서, 아람어가 아니라 희랍어를 사용하며, 또한 기본적으로 농가나 농경적 유대 배경이 아니라, 로마, 에베소, 안디옥 등과 같이 도시의 이교 환경 가운데에 있으면서 복음에 접촉하게 된 후대 공동체들의 필요를 위해 이 이야기를 다시 말하게 된 차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복음서들은 이미 우리들에게는 해석학적 모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복음서는 부분적으로는 전기적이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전기집은 아니다. 또 복음서는 비록 가장 위대한 사람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긴 하지만, 위대한 사람에 대한 당대의 '일대기'와 같지는 않다.
복음서는 '사도들의 회고록'이다. 4개의 전기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채 나란히 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들은 나란히 서 있으니, 그것은 이 책들은 일제히 동시에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회상시켜 주며, 각각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서들의 특성이요, 특징이며, 이러한 사실이 석의나 해석학에 있어 모두 중요한 요인이다.

역사적 배경.
역사적 배경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 자신과 관계가 깊다. 여기에는 1세기의 문화와 종교에 대한 인식, 그 분이 사셨고 가르치셨던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 대한 인식, 그리고 교훈을 하시거나 비유를 말씀하실 때의 특별한 배경에 대한 이해력 등이 포함된다.
또 역사적 배경에는 복음서 저자들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와 그들이 복음서를 쓰게 된 이유나 목적에 대한 이해도 포함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처한 역사적 배경 - 일반적 고찰.
역사적 배경 분야에서 특히 중요한 양상인데도 종종 간과되었던 것은 예수님의 교훈의 형식에 대한 문제이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누누이 비유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의미심장한 과장법 사용의 명수이셨다.

예수님이 처한 역사적 배경 - 특수 고찰.
복음서의 내용은 개별적인 이야기 또는 어록들로 전달되어졌다. 이 어록들 중 대부분은 그 원래의 상황 그대로 전수되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 단편적 어록들을 선언적 이야기라 칭하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단지 설화를 결론짓는 어록을 위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어록들이 전후 문맥이 없이 복음서 기자들에게 전래되었고, 복음서 기자들이 친히 성령의 인도하에 이 어록들에 그들의 이 문맥들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복음서를 읽을 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예수님께서 어떤 가르침을 하실 때 그 청중들은 과연 누구였겠는가? 그와 가까이 있던 제자들이었나? 아니면 수많은 군중이었는가? 아니면 그의 적대자들이었는가?

예수님께서 처한 역사적 배경을 발견하고, 그의 교훈의 대상이 되는 청중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의 근본적인 의미를 아는 데 반드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에 대한 지식은 독자의 관점을 넓히고 심지어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요점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이 처한 역사적 배경.
복음서 자체는 출처가 어디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에, 각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의 자료를 선정하고 정리하여 배열한 방법에 의해 그들의 관심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신할 수 있다.
예) 마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메시야직의 특성을 설명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마가의 관심은 예수님의 메시야직을 고난받는 종으로 그리고 있다는 사실은 막8:31-33의 예수께서 그의 고난을 처음으로 설명하시기 전까지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 제자도에 관한 교훈을 하나도 싣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훨씬 더 분명해진다.

문학적 배경.
문학적 배경은 복음서의 각 문맥에서 특정 단편 단위의 위상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복음서에 있는 수많은 자료들이 현재의 문맥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가 복음서 기자들이 성령의 영감에 따라 배열한 까닭에 있다.
이 항목에서 우리가 제시하려는 바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독자들이 복음서의 현문맥에 위치한 각 설화들을 해석하거나 읽을 때, 그 이해력을 증진시키는 일,
2) 복음서의 전체 구성의 특성을 이해시켜, 복음서의 한 부분을 예수님의 생애에 관한 제반 사실들과 상관없이 해석하지 않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개별 단편들을 해석하기.
서선서 해석 원리에 적용된 '문단별로 생각하는 법'은 복음서에서는 그리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지 않는다. 복음서는 고유한 성격 때문에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여야만 한다.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것과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수평적으로 사고하는 것 - 우리가 어떤 한 복음서의 단편을 연구할 때, 우리는 다른 복음서에 있는 병행 구절들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 하나님께서 4개의 복음서를 주셨다는 것은 그 복음서들을 각기 독립적으로 읽는 것은 정당한 일일 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병행적으로 복음서를 연구하는 목적은 어떤 사실들을 조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각 복음서의 특징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수평적으로 사고해야 할 기본적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병행구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각 복음서의 특징을 인식하게 해 줄 것이다.
둘째. 그 병행구들은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또는 유사한 자료들이 그 후 교회들에서 존속했던 각기 다른 종류의 문맥들을 인식하도록 해 줄 것이다.

이처럼 복음서의 병행 구절들을 인식하고 있으면, 동일한 자료들이 왕왕 초대교회에서 어떻게 새로운 문맥에서 각기 다르게 사용되었는지를 아는 데 도움을 얻을 수가 있다.

*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것 - 수직적으로 사고한다는 말의 의미는, 복음서의 설화나 교훈을 읽거나 연구할 때, 두 역사적 배경 - 예수님께서 처한 역사적 상황과 복음서 기자가 처한 역사적 상황 - 을 모두 인식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말이다.

경고 : 수직적으로 사고하는 목적은 역사적 예수의 생애를 연구하고자 함이 아니다. 현재의 형태로 된 복음서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예수님의 생애를 스스로 재구성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건전한 해석이란, 어떤 주어진 본문을 현재 기존한 성경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기 위한 적절한 입문으로서 먼저 그 본문이 처한 원래의 역사적 배경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할 것을 전제로 한다.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는 주인에 자기의 관용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대가는 공정 원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비유가 원래 상황에서는 아마도 예수께서 죄인 등을 용납하시고, 이 행동에 대해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해 자신을 변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을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종일토록 수고와 더위를 견딘' 자들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더 많은 삯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그러우시며 은혜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가 '의인들'을 용납하시는 것과 똑같이 죄인들을 기꺼이 용납하시는 것이다.

본 비유의 요점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관용이다. 그러나 마채복음에서는 이 비유가 제자도의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즉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자들은 나중된 자들이었으나 먼저 된 자들이다.

복음서를 전체로서 해석함.
여기서는 독자들이 복음서를 읽고 연구할 때, 복음서 기자가 가지고 있던 저작 관심과 방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려는데 있다.
복음서가 기록되는데 작용한 두 가지 원칙들이 있다.
선별과 각색이다. 한편으로, 복음서 기자들은 성령의 감동을 입은 저자들로서 그들의 목적에 맞는 설화들과 교훈들을 선별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선별하는 데에는 굉장히 신중했음을 요한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1:24) 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 줄 아노라'

동시에 복음서 기자들과 그 교회들은 그들이 선별한 것들을 또한 각색하도록 하는 특별한 관심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면, 요한은 우리들에게 특별히 그의 목적이 신학적이었음을 공공연히 알려주고 있다.
'(요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또 예수님이 유대의 메시야라는 이런 관심은 요한의 대부분의 자료가 예수님의 유대와 예루살렘 사역을 다룬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런 각색의 원리는 복음서들 사이의 상위점들을 대부분 설명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그 상위점 가운데 가장 알려진 것들 중 하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다.

마가복음의 무화과나무 저주 이야기는 상징적인 신학적 의의를 위해 쓰여졌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과 그 나무가 마르기 시작한 사건 사이에 예수께서는 성전을 정결케 하심으로써 유대주의에 동일한 심판을 선언하시고 계신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는 신앙에 관한 교훈이 본 이야기의 유일한 관심사이다.
그래서 마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과 마른 것을 신앙 강조를 위해 함께 연결시키고 있다.
또 매 경우마다 무화과나무 이야기를 전하는 일은 두 복음서 기자들 모두 영감하신 성령의 사역임을 기억하라.

막1:14-3:6의 예증을 보기로 하자.
마가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에는 세 단계가 있다.
⑴ 군중들에게 인기를 얻으시던 때
⑵ 소수에게 제자됨에 대하여 가르치시던 때
⑶ 그리고 고위직에 있는 자들로부터 반대를 받으시던 때

* 예수님의 공적 사역의 선언(1:14-15)이 있은 후, 처음 설화는 처음 제자들을 부르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주제는 3:13-19, 4:10-12, 4:34-41 등에서 계속 세분화되고 있다.
* 1:21-2:45에는 네 개의 단편들이 있다. 가버나움에서의 하루, 다음날 있는 짧은 설교 여행, 그리고 문둥병자를 고친 이야기 등. 이 부분의 전체적인 공통적 주제는 예수님의 명성과 인기가 급속도로 퍼진다는 것이며, 그 인기는 예수께서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그에게로 나아오더라'(1:45)는 구절로서 그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여기에 마가는 거듭거듭 사용하는 문구인 '그리고 곧'(1:21, 23, 28, 29, 31, 42절<개역성경에 이 문구가 빠져있다>)과 마가가 매 문장을 시작할 때마다 사용한 접속사 '그리고'(이것도 역시 개역 성경에는 생략)가 있을 뿐이다.

* 마가는 5개의 다른 유의 설화들을 선별하여 반대 장면을 묘사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처음 네 단편들에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은 '어찌하여'라는 의문사이다(2:7, 16, 18, 24).

해석학적 관찰들.
교훈들과 명령들.
복음서들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교훈들과 명령들을 20세기의 문맥에 옮겨 놓아야만 한다.
예수께서 현세대와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하셨던 말씀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추측하기에 앞서 그 추측이 올바른 것인지를 조심스럽게 검토해 보아야만 한다.
우리에게 오리를 가자고 강요하는 로마 병사는 없다(마5:41).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님의 말씀의 요지는 '기독교인의 호의'로서 이것과 비교될 만한 수많은 상황 속에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여기서의 명령은 기독교인이 되거나 또 기독교인으로 남기 위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는 율법이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것들에 완전히 순종하는데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납하셨기 때문에, 기독교인의 삶은 마땅히 어떠한 삶이 되어야 할지를 묘사한 것이다.

먼저는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사죄함이요, 그 다음에는 우리의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무한정한 용서함이 뒤따라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종교는 은혜요, 윤리는 감사이다. 예수님의 명령은 하나님의 사랑받고 구속함을 받은 자녀로서 마땅히 살아야 하는 새로운 삶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설화들.
설화들은 복음서들 내에서 한 가지 방법 이상의 역할을 하는 경향이 있다. 예로 이적 이야기들은 도덕적인 교훈을 제공하거나 선례를 남길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이적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 속에 표출된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활기있게 예증하는 역할을 한다.

부자 청년의 설화에서,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들의 소유를 다 팔아야만 한다는 것이 그 이야기의 요지가 아니다. 오히려 부자 청년 이야기는 부자가 먼저 물질에 철저히 고착되어있고, 그것으로 안전을 유지하려는 애를 쓰고 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부자들에게도 이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대단히 중요한 조언.
누구든지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분명히 이해하지 않고는 복음서를 정당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감히 생각지 말라.
먼저, 독자는 전체 신약성경의 기본적인 신학적 구조는 종말론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 당대 많은 유대인들은 종말론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다.
유대인의 종말론적 희망은 아래와 같다.


종말의 도래는 새로운 시작 - 하나님의 새 시대의 시작과 메시야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 새 시대는 하나님 나라를 지칭하기도 한다. 새 시대는 의의 시대이며,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오셔서 그의 사역과 함께 도래할 그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언하셨다(막1:14-15, 눅17:20-21).
사람마다 과연 그가 참으로 오실 그이인가 하고 그를 계속 주시하였다. 그가 참으로 그 모든 영광으로 메시야 시대를 도래케 할 것인가? 그런데, 그는 돌연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빛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나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셨고, 성령의 충만함, 상징과 기사들이 있었지만, 종말은 분명코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러므로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 종말은 아직 충만히 임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종말은 이미와 아직의 구조 속에 있다.

신약성경의 많은 가르침, 특히 예수님의 사역과 교훈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열쇠는 이러한 '긴장'을 발견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통치의 때가 예수님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생활하여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를 은혜로써 용납하시고, 죄를 사하여 주신 그 분의 주되심 아래에서 생활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윤리가 우리들의 생활과 이 현시대의 세상 속에서 역사하도록 해야 한다.